"나는 경비원"…형의 죽음 잊기 위해 직업까지 바꾼 남자 [뉴요커 이야기]

입력 2024-03-04 11:48   수정 2024-03-04 23:37



“여기 벽에 유달리 새까만 부분이 보이죠? 이게 가드 마크입니다. 경비원들이 늘 여기에 기대어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자국이지요.”

지난 2월 25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에서 동쪽 5번 애비뉴에 붙어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남자가 관람객 10여명 앞에서 기둥 한쪽의 까만 자국을 가리키며 이처럼 말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81번가 입구에 서서 50m쯤 걸어들어오면 그리스 조각상들이 모여있다. 그리스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의 머리 동상이 있는 방 입구에 서서 왼쪽을 돌아보면 이 남자가 말한 가드 마크가 보인다.

이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 브링리로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가이드 투어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다. 동시에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형의 죽음 겪은 뒤 메트 경비원으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브링리가 형의 죽음을 겪은 뒤 원래 직장이었던 미국의 유명한 주간지 ‘뉴요커’를 떠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한 뒤 10년을 담은 에세이다. 브링리는 이후 가정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경비원 일을 그만둔 뒤, 맨해튼에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중심으로 가이드 투어를 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제안 이메일에 자신이 이끄는 투어 팀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둘러본 뒤 인터뷰를 하자고 역제안을 해왔다.

전도유망한 생물학도였던 그의 형은 2년 넘게 암으로 투병하다 2008년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브링리에게 형은 두살 터울이었지만 큰 어른처럼 느껴지던 인물이었다. 브링리는 책을 통해 그의 형은 죽음을 앞두고도 박사 논문을 끝내기 위해 성실히 공부하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동생과 TV로 야구 경기를 보고 재미있게 읽은 책의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다.

브링리는 그의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브루클린에 있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라고 자문한 뒤 곧바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자원했다.
메트의 예술품과 사람에서 치유받아
이날 브링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내에서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기자를 포함한 관람객들은 브링리 덕분에 경비원부터 청소부, 미술관 내 서점 직원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브링리는 처음 미술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땐 말수가 적었다.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고 그 안에서 치유 받는 일을 반복했다. 브링리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예술가들이 인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을 보며 그 안에서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동료 경비원들과의 우정도 그의 삶을 바꿔놨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엔 남미 가이아나부터 러시아 남쪽의 아제르바이잔까지 다양한 국가 출신의 경비원들이 모여있다. 그중엔 토고에서 일하던 기업의 내부 부패를 고발하려다 암살 위협을 받고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도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중심지인 이란 도시 시라즈 출신의 여성 경비대장도 인상 깊은 동료다.

브링리는 “슬픔 때문에 세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메트로폴리탄에 왔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 동료들과 어울리며) 세상의 리듬에 맞추고 친구를 사귀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책에선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스스로가 영원히 숨을 죽이고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로 관람객 사로잡아
브링리의 책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치유하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작품을 그만의 시선으로 해석한 점도 눈에 띈다. 유명 작품보다는 경비원으로 일하는 동안 자신이 좋아했고 그 안에서 위안받았던 미술품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브링리의 가이드 투어도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됐다.

헤르메스의 대리석 두상을 안내하면서는 1979년 2월 도난 사건을 설명했다. 당시 없어졌던 헤르메스의 두상은 며칠 뒤 밸런타인데이 때 제보에 의해 맨해튼의 그랜드 센트럴 역 보관함에서 발견됐다. 눈 위엔 하트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브링리는 “아마 여자친구에게 보여주려고 훔친 어떤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되돌려 놓았을 수 있다”고 농담하자 관람객들이 함께 웃으며 호응했다.

14세기 유럽 중세 시대 작품들이 있는 방에 가서는 그림의 주변에 그려진 이국적인 문자에 관해 설명했다. 브링리는 “당시 유럽사람들에게 중동은 ‘부’를 상징했다”며 “그래서 작품마다 주변 테두리를 아라비아 스타일을 흉내 낸 문자 아닌 문자를 그려 넣었다”고 말했다. 그의 투어는 이집트관을 거쳐 중국관에서 마무리됐다.
작품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가이드 투어가 끝난 뒤 브링리는 기자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브링리는 저서와 가이드 투어에서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을 묻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소개할 뿐이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제 책이 인기가 있다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기자가 아마도 한국인들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대한 호기심에다 책을 통해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어쭙잖은 답을 내놓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브링리는 그의 책 덕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찾을 한국인에게 당부할 말을 묻자 “사람들은 미술관에 오면 무조건 무언가를 공부하고 배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그보다는 미술관에 왔을 때 스스로를 풀어주고 놓아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가이드북 대로 따라가기 보다는 혼자서 미술관 안에서 길을 잃어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나는 한 작품만 있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투어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을 배우려 하지 말고, 예술 안에서 배우라(Don't learn about art, learn from it)’는 말을 꼭 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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